큰사전 편찬 한글학자, 정태진 선생님

‘큰 사전’을 엮다가 죽었다 살아난 몸,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큰 사전’은 꼭 내 손으로 완간하고야 말겠다.'라는 다짐을 품으며 한글학자 정태진이 쓴 시이다. 이달의 문화 인물은 일제 치하에서도 한글 지키기에 헌신해 온 정태진이다. 독립운동가이면서 국어학자인 그는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2년 10개월간 옥고를 치르면서도 우리말을 정리하여 [큰사전] 편찬을 위해 평생의 바치신 분이시다.

일제시대 한글학자들은 목숨을 건 문화적 전사였다. 그들이 비록 총칼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 일제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한글운동의 전선(戰線)을 일거에 무너뜨리려고 꾸민 조작극이었으며, 그 서막의 함정에 빠진 이가 ‘석인’ 정태진(1903∼1952)이었던 것이다. 정태진의 해적이(연보)를 보면 그는 39세 되던 해인 41년 6월 10여년간 근무했던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를 사직하고 조선어학회 ‘조선 말 큰 사전’의 편찬원이 된 다음 이듬해 9월 체포된다.

그가 감옥에 갇힌 뒤 부친은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장남은 일본군에 징집되어 생사를 알 길이 없었으며 아내는 몸져누워 결국 46년 세상을 뜨고 만다. 일제는 물러나고 마침내, 48년 한글날에 '큰 사전’ 첫째권이 나왔으며, 49년 봄에는 둘째 권이, 50년 봄에는 셋째 권이 나왔다. 6.25전쟁 중에도 서울이 수복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을 건너와 땅 속에 묻어두었던 원고를 꺼내어 넷째 권을 마무리지었다.

이제 두 권만 정리하면 완간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지 5백여년만에 한글은 비로소 자기 집을 갖게 된 것이다. 그동안 비바람 치는 처마 끝에서 ‘암클’로 어둠에 갇힌 ‘조선어’로 살아왔는데 이제야 ‘말모이’로 통일을 눈앞에 둔 것이다. 정태진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고향으로 가는 군용 트럭에 올랐다. 쌀을 구해와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길이 될 줄이야. 전쟁으로 무너진 길을 달리던 트럭이 그만 논으로 굴러떨지고 만 것이다. 52년 11월, 한창 일할 나이인 쉰살이었다. 그는 갔지만 그의 정신은 우리말 사전 속에서 고딕체로 명조체로 살아숨쉬고 있다. 한글처럼 아름다운 삶이었다. ----- <문화일보 인터넷 신문>에서